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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내가 사랑한 것/사람 들

[자발적 소박함의 선구자들 (2)] 간디 · 니어링 부부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살 되던 해(1845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직접 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던 2년간의 삶의 기록을 모은 책 『월든』을 출판했다. 숲속으로 들어간 지 9년 후인 1854년의 일이다. 

1906년 경 요하네스버그에서 간디는 『월든』을 읽었다. 아마도 그 전후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읽은 것도 확실하다. 간디에게 있어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월든』이 출판된 지 꼭 100년이 되던 해인 1954년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는 『조화로운 삶』을 출판했다. 사람들은 20세기판 『월든』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모두 삶의 원칙으로서 자발적 소박함을 내세웠다. 

법정 스님은 그들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런 만큼 스님은 그들처럼 살았다. 이번 호에서는 지난 호의 소로에 이어 마하트마 간디와 니어링 부부의 삶과 사상을 소개한다.



마하트마 간디, 혹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우리에게 마하트마 간디로 더 익숙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그는 평생을 영국의 제국주의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며 인도독립에 헌신했다. 인도 민중들은 그런 그에게 마하트마, 즉 위대한 영혼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부르기를 즐겨했다. 그 수식어가 붙은 이름이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래서 우리에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라는 본명이 생소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마하트마’라는 존칭이 이토록 광범위하게 퍼진 것은, 간디가 지니는 세계사적 위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인도 독립을 위해 비폭력 저항으로 인도 민중을 이끈 독립운동가요, 현실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느 정치인과 달랐다. 그는 민족의 독립을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늘 사티아그라하(진리 파지· 眞理 把持), 아힘사(비폭력), 욕망에 대한 경계, 자유에 대한 옹호 등과 같은 근원적 차원과 연결됐다. 그의 삶 역시 그것에 기초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 정치인의 범주에 속하기도 하지만 인도인들의 정신적·영적 스승의 자리에 위치하는 전무후무한 역사적 존재가 됐다. 경제와 윤리의 관계를 재해석하고, 현실과 이성, 정치와 정신의 영역을 통합하고자 한 그에게 전 세계의 민중들은 ‘마하트마’라는 칭호로 존경의 마음을 보냈던 것이다. 

 

두 켤레의 샌들과 힌두교 경전

간디의 사상은 넓고 깊다. 그래서 단편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여러 이견도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자발적 소박함의 기초가 되는 아파리그라하(무소유)의 사상이다. 간디 그 자신 철저하게 소유로부터 해방되어 근원적인 자유를 갈망했다. 두 켤레의 샌들, 평생 동안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 밥그릇, 안경 등 그가 남긴 몇 안 되는 재산목록은, 그의 그런 갈망이 실현되었음을 알려주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간디는 무소유에 기초한 자신의 삶을 증거로, 많은 사람들에게 무소유를 권유했다. 특히 그는 자본가와 지주들에게 더욱 더 강력히 무소유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무소유는, 사적 소유의 완전한 철폐를 주장하던, 당시의 사회주의 사상과는 다른 성격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힌두이즘에 기초한 아파리그라하를 ‘보관인 정신론(the theory of trusteeship)’으로 보완했다. 가진 자들의 자선이나 베풂 정도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아파리그라하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토대를 ‘보관인 정신’으로 보완했던 것이다. ‘세상에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본디 없으며, 다만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라는 보관인 정신은, 기존의 자산가와 지주들의 소유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이 가진 재산과 부(富)의 공공적 성격을 강조하는 절충적인 것이었다. 

 

모든 부(富)는 잠시 보관하고 있는 것일 뿐

후일 간디의 정신적·정치적 계승자인 비노바 바베에 의해, 보관인 정신은 토지헌납운동이라는 형태로 사회운동으로 현실화되기도 했다. 보관인 정신에 따르면 토지 역시 어느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토지헌납운동은 보관인 정신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으며, 사회적인 기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토지헌납운동을 통해 인도의 많은 부자들이 토지를 기부하였고, 많은 민중들은 씨 뿌리고 물 주어 먹을거리를 생산해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땅을 확보했다. 


간디의 위대함은 현실과 이상, 경제와 윤리, 정치와 정신의 간극이 날로 커져가는 상황에서 그 사이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물질적으로는 소박하지만 내면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의 가치를 회복해 낸 데 있을 것이다. 법정스님은 그런 간디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았다. 그래서일까. 스님의 대표작 「무소유」도 간디의 말로 시작한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소박한 삶에 대한 스님의 열망이 구체적인 무소유 사상으로 형성되는 시점도 바로 이때다. 


그 후 1989년에 스님은 인도를 여행했다. 여행길에 간디의 오두막을 들렀다. “그의 방은 수도승의 거처보다 훨씬 간소한 데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내 자신 지닌 것이 너무 많아 몹시 부끄러웠다”라고 썼다. 간디를 통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을 성찰했다. 비록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간디의 그것처럼, 사회운동으로 확산되면서 사회구조적 개혁의 요구에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소유의 감옥’에 갇혀 있는 우리사회에 커다란 경책이 된 것만은 틀림없다. 어쩌면 무소유에 기초해 토지헌납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으로 확산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늘의 우리 자신의 몫인지도 모르겠다.   


니어링 부부의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우리 사회에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가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스님이 사랑한 ≪녹색평론≫ 1995년 3·4월호(21호)가 헬렌 니어링과의 대담기록인 「아흔 살의 관

점」을 번역해 실으면서, 니어링 부부는 우리 사회에 첫선을 보였다. 1997년 「아흔 살의 관점」을 감명 깊게 읽은 이석태 변호사가 헬렌 니어링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번역 출판하면서, 니어링 부부는 우리사회에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순하면서도 충만한 삶’에 대한 이들 부부의 실험은 좀 더 오래 전의 일이었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뿌리에서부터 반대하는 완강한 급진주의자 스코트와 신지학(神智學)에 흠뻑 빠져있던 음악도 헬렌은 1928년에 만났다. 대학교수였지만 급진적이고 반체제적인 활동을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나고 정부로부터 스파이로 몰려 기소되기도 했던 스코트는 45세가 되던 해였고, 헬렌은 24세 되던 해였다. 그들은 그후 1932년에 의기투합해 버몬트 주 숲속에 들어가 직접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글을 썼다. 


20년 동안의 버몬트 숲속에서의 생활은 1954년에 『조화로운 삶』으로 출판되었다. 그 후 버몬트 주가 급속도로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하자 메인 주로 거처를 옮긴다. 부부는 거기에서의 삶의 기록을 다시 『조화로운 삶의 지속』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았다. 니어링 부부는 함께, 또는 각자 다양한 강연과 글들을 쓰고 책을 냈지만, 자신들의 실험적인 삶의 이야기는 이 두 책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됐던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에 대부분 담겨 있다.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는 스코트가 세상을 떠난 뒤, 홀로 남겨진 헬렌 니어링이 자신의 삶, 스코트와의 만남과 그와 함께한 삶, 그리고 스코트를 떠나보낸 후의 생각들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스코트는 100세 생일을 뒤로 하고 1983년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났다. 헬렌은 그가 떠난 지 9년 후에 이 책을 출판했고, 3년 후인 1995년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니어링 부부, 시골마을로 가다

“뉴욕에서 그 시골까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생활환경은 그야말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복잡하고 세련된 도시에서 살다가 바로 이웃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로 건너갔을 뿐인데, 그 곳에서는 어른이고 아이고 큰 도시를 구경해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두가 나무를 때서 난방을 하고, 기름등잔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집은 단 한 곳도 없었다.”(『조화로운 삶』) 오늘날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세계자본주의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주요 대도시에서 대부분의 성장기를 보냈던 그들에게, 버몬트의 시골마을은 그 생활환경과 생활방식에 있어 아득한 거리감을 안겨주었나 보다. 


그럼에도 부부가 시골마을을 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코트는 시골에서의 삶을 감행하기 이전에 꽤 오랜 동안 반체제 정치 활동과 저항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착취를 부추기는 가치와 실천에 저항하는’ 활동이 스코트의 삶 전반부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신념은 당대의 주류 이데올로기와 불화를 일으키고, 그의 활동은 정치와 사회 운동의 영역에서 갈 길을 잃는다. 어쩌면 스코트에게 있어, 그것은 좌절일지도 모르겠다. 좌절 끝에 그가 택한 길이 바로 시골에서의 삶이었다. 


자본주의가 삶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그는 자본주의와 완벽한 단절을 감행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가지는 모순을 당시 대중들에게 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자본주의와 완벽하게 단절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먹고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동과 교환체계를 통해 얻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역시 시골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은 도시가 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자급자족하며 충만한 삶은 가능하다

하지만 스코트의 시골에서의 삶은 헬렌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실제로 감행될 수 있었다. 그것이 1932년의 일이었다. 도시를 떠나면서 니어링 부부는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독립된 경제를 꾸리는 것’,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것’,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 목표 아래 니어링 부부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단순하고 만족스러운 삶’, ‘자연 속에서 서로 돕고 기대며, 자유로운 시간을 실컷 누리면서 저마다 좋은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는 삶’을 머릿속에 그렸다. 


놀랍게도 그들의 시골생활은 자신들이 스스로 세운 목표를 실현했으며, 자신들의 머릿속에 있던 삶을 창조해 냈다. 그들은 치밀한, 하지만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노동을 했다. 손수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독립된 경제, 즉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하루에 네 시간 생계 노동, 네 시간 지적 활동, 네 시간 공동체 활동이라는 생활원칙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생계노동을 제외한 시간에, 그들은 음악을 듣고 글을 썼으며, 지역 주민들과 교류 했고, 자신들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우정과 환대를 베풀었다. 니어링 부부의 이런 삶은 메인 주에서의 또 다른 시골생활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스코트가 100세가 되던 해 세상을 떠나고, 후에 헬렌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이 살았던 메인의 시골집은, 헬렌의 바람대로 ‘굿라이프 센터(Good Life Center)’로 탈바꿈했다. 굿라이프 센터는 니어링 부부처럼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 자급자족하며 충만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과 체험의 공간이 되었다. 

 

소로에서부터 간디와 니어링 부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소박한 삶을 지향했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통해 내면의 풍요로움을 더하는 생활을 갈망했으며, 자신들의 삶으로써 그것이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의 방식의 변화가 어떻게 사회변화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법정 스님은 그들, 자발적 소박함의 선구자들을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만큼 그들의 삶을 좇았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어떻게 하면 외적으로는 소박하지만 내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통해, 개인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회의 진보를 성취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통권4호_2015년 첫번째